1990년대 이후 미국은 자신이 원하는 국제정치 및 경제 질서의 원칙들을 전 세계에 적용 또는 강요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해졌다. 미국은 전 세계 국가들이 미국식 자유주의 경제 질서와 민주주의를 따를 것을 종용하거나 강제했다. 1990년대 이후의 세계가 ‘세계화의 시대(Age of Globalization)’로 진입하게 된 것은 미국의 패권(Pax Americana)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소련의 도전을 물리치고 패권국으로 등극한 미국의 국가 대전략은 이제 자국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되었다. 미국은 현상 유지(Status Quo)를 지향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1990년대 10년 동안 미국의 대전략은 경제적인 세계화를 통해 자신의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세계화 시대야말로 미국이 게임을 벌이기 가장 좋은 상황이었다. 일등의 지위를 차지한 국가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미국은 자신의 전략적 우위 상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국가 목표로 삼고 있다.
패권국의 지위를 차지한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성취하려’하지 않는다. 미국은 이미 원하는 바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면 된다. 이제 미국의 대전략은 ‘남이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미국이 무엇을 성취하겠다기보다는 미국을 향한 도전국들이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미국의 대전략이 현상 유지적 성격을 가지는 이유는 미국이 이미 패권국이 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특수한 지정학적 요인으로부터도 나온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유럽 및 아시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정학적 특성상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서 패권국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국가 대전략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유럽 혹은 아시아를 장악한 패권국은 궁극적으로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막강한 국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적 패권의 출현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은 전통적인 ‘세력균형 전략’이다. 즉, 유럽 또는 아시아에서 항상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국가 혹은 국가군이 상호 균형과 견제(check and balance)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미국 국가 대전략의 예외적 유연성과 실용성이 나온다. 미국은 언제라도 유럽 및 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세력균형의 게임에서 밀리고 있는 나라, 즉 약한 나라를 지원해 왔다. 독일이 강할 때 미국은 반 독일 전선에 섰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유럽의 압도적인 강자로 등장하자 미국은 패전국인 독일을 자기 편으로 끌어안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만들어 소련에 대응했다.
아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직접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치렀으며, 2차 대전 당시 일본과 싸우는 소련과 중국을 지원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배한 이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득세하게 되자 미국은 아시아 대륙의 공산주의 강대국인 소련과 중국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일본을 다시 부흥시켰다. 1970년대 초반 중·소 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만과 단교하였다.
중국과 사실상의 전략 동맹관계에 들어간 미국은 중국과 함께 소련을 붕괴시키는 작업을 도모했다. 소련이 몰락한 이후 중국이 부상하자, 미국은 다시 일본과 러시아를 이용하여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서의 힘의 균형관계를 관망하고 있다가 패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이 나타나면, 언제든 약한 편에 서서 개입했다. 미국의 대유럽 및 대아시아 전략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은 적나라한 힘의 균형이지 도덕적 고려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