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래 국제정치학의 대표적 시각이었던 월츠의 구조적 현실주의는 21세기가 시작된 이래 새로운 제3세대 현실주의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2001년 간행된 미어셰이머 교수의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은 고전적 현실주의, 구조적 현실주의가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주의를 제시하였다.
미어셰이머 교수는 자신의 현실주의 이론을 공격적 현실주의라고 명명했다. 그는 특히 역사상 나타났던 모든 강대국들은 국력의 거의 ‘무한한’ 증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국가들은 모두 힘을 증강시키려고 노력하는데, 어느 정도 힘이 증강된 후 그 힘의 증강을 멈추려 하는 나라들은 없었다는 말이다. 미어셰이며 교수는 결국 이 세상 어떤 강대국도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패권국’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방대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우선 미어셰이며 교수는 자신의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이 모겐소와 월츠의 제1세대, 제 2세대 현실주의와 다르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지적한다.
미어셰이머 교수의 세대별 현실주의 분류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의 기준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국가들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도 권력(힘)을 추구하느냐의 문제이고, 둘째는 국가들은 얼마만큼 큰 힘을 가지려고 하느냐의 문제이다. 결국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기본개념은, 국가들은 힘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만 왜? 그리고 얼마만큼? 이라는 문제에 대해 약간 씩 상이한 답을 하고 있을 뿐이며, 이 답의 차이에 따라 현실주의 이론의 세대 구분이 가능한 것이다.
미어셰이며 교수는 구조적 현실주의를 ‘방어적 현실주의‘(defensive real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국가들은 어느 정도 국력을 가져야 상대방과 균형을 이룬 상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힘을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미어셰이며 교수는 국가들이 힘을 추구하려는 동인(動因)을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처럼 인간과 국가 속에 내재하는 본능으로 보지는 않는다. 본능이기 보다는 국제체제의 속성 때문에 국가들은 힘을 추구하려는 동기를 가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권력 추구의 동기라는 측면에서 공격적 현실주의는 구조적 현실주의와 입장이 같다. 그러나 공격적 현실주의는 국가들의 권력추구는 그 끝이 상대방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완전히 압도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국가의 권력 추구에는 멈춤이 없다는 주장이다.
위의 질문 중에서 국가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동기에 관한 질문은 대답하기 대단히 어렵다. 국가의 본질과 철학에 관한 연구가 있어야 대답할 수 있는 일이다. 국가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서 생존의 본능, 권력 추구의 본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들이 살아가는 국제사회가 개인들이 거주하는 국내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국가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이유는 역시 무정부적 국제정치 환경이 더 큰 요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비교적 안전한 사회에 살고있는 우리들은 법을 집행하는 경찰, 검찰 등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권총이나 칼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옛날 미국의 서부처럼 막강한 공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개인들은 스스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국제정치 혹은 국제사회의 발달 수준은 옛날 미국의 서부 수준보다 못하다. 서부의 카우보이처럼 국가들은 스스로 총을 차고 다녀야 한다. 자신을 방어할 책임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없는 것이 국제사회이다. 이런 곳에서 총을 차고 다니는 이유는 본능 때문일까? 환경 때문일까?
두 번째 질문, 즉 국가들은 얼마나 많은 힘을 가지려 하는가의 문제는 대답하기가 비교적 쉬울 것 같다. 국가들은 얼마나 많은 힘을 가지고자 하는가? 국가들이 목표로 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나라들은 더 이상 힘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을 그만 두게 될 것인가? 상대방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면 만족할 것인가 혹은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더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국가들은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힘이 우월한 상태를 추구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역사가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격적 현실주의는 국가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몇 가지 상이한 해설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것은 국가들의 행동은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모겐소와 월츠 등은 국가들은 힘의 균형을 이룩하기 위한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말한다. 3개의 국가들이 A국(100), B국(30), C국(70)과 같이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고전적 현실주의와 구조적 현실주의가 말하는 세력균형이론에 의하면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B(30)와 C(70)는 연합하여 A에 대항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B와 C가 연합하려는 행동이 바로 균형의 행동(balancing)인 것이다.
그러나 공격적 현실주의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 B는 A에 편승하는 경향을 보이려 하지 C와 연합하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B가 A에 달라붙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것을 편승하기(bandwagon)전략이라 부른다. 미어셰이머 교수는 역사상 많은 나라들, 심지어는 강대국들조차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편승하는 편을 더 많이 택했다고 주장한다.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은 힘이 약한 B가 C와 동맹하여 세력균형을 이루기보다는 강대국 A에 편승한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이미 논한 바 있지만 월츠 교수는 21세기 미국 패권시대를 맞이하며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 다른 강대국들이 궁극적으로 미국에 대항하는 연합을 형성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은 공격적 현실주의에 의한 설명이 더욱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일본과 영국은 미국에 완벽하게 편승하려고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미어셰이머 교수의 공격적 현실주의가 국제정치의 실제 현실에 가장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항상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온 한국인들은 국제정치를 공격적 현실주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훨씬 안전하리라고 생각된다. 우리 주변의 나라들은 모두 힘을 더욱 증대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하며, 우리가 어떤 전략을 취할 때 가장 안전한가의 문제도 공격적 현실주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쉽게 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신문사 정치부장이 쓴 현실주의 시각을 대표적으로 반영하는 시론을 인용해 본다.
“안보는 전쟁이 났을 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터질 가능성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다. 전쟁 가능성을 0.00001도 없게 만드는 것이다. 북한이나 잠재적 적국인 주변국이 전쟁을 꿈도 꿀 수 없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이 나면 미국이 엄청난 힘을 한반도에 퍼부어 북한이나 잠재 적국을 단번에 파멸시킬 것이란 사실을 김정은이나 잠재 적국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