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멋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약자는 그들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The strong do what they want and the weak suffer what they must) ‘멜로스 담판’을 한마디로 압축한 유명한 구절이다. 현실주의 역사학의 문을 연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남긴 말이다. 명저(名著)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에서 하는 말이다.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 강대강(强對强)의 갈등 관계에 주목한다고 볼 때, ‘멜로스 담판은’ 강대약(强對弱) 국제 관계에 초점을 맞춘 교훈이다. 전 세계 패권을 노리는 고래들 간의 싸움이 아닌, 고래와 새우와의 갈등에 집중하는 얘기가 ‘멜로스 담판(the Melian Dialogue)’의 역사적 의미다. 사건은 기원전 426년 아테네가 2,000명의 군사를 멜로스에 파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다. 기원전 431년에 시작되어 404년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전쟁 발발 5년 만에 터진 돌발적 사태가 멜로스 공격이다.
멜로스는 인종적으로 스파르타와 피를 나눈 도시국가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특별히 스파르타를 지지하거나 군사력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당시 에게 해(海) 대부분의 폴리스(Polis : 도시국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면서 함께 전쟁을 치렀다. 돈이나 식량 같은 공물(貢物), 군인과 배를 비롯한 군사물자 제공 여부가 지지를 가늠하는 기준이다.
멜로스는 양국 간 싸움에 중립(中立) 정책을 표방하면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테네는 군대를 파견, 멜로스에 자기들을 지지하라고 강요한다. 담판에 들어간 멜로스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결코 아테네를 배척하거나 해(害)를 주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아무런 피해도 안 주는 작은 폴리스를 공격하는 것은 신(神)의 섭리에도 어긋난다면서, 중립을 지키는 멜로스의 ‘도덕성’을 믿어 달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2,000명의 군대를 보낸 아테네는 자기 편에 가담하지 않을 경우 곧바로 공격하겠다는 최후의 통첩을 보낸다.
‘강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운운하는 말은 담판이 끝나기 직전 아테네가 던진 말이다. 멜로스는 약한 자국(自國)을 무력으로 짓누를 경우, 에게해의 다른 폴리스들이 대국 아테네를 존경하지 않고 적대시 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해도 안 입히는 작은 섬 하나를 장악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보면 주변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줄 뿐이라고 읍소(泣訴)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친구가 아니면 적(敵)”이라면서 막무가내 힘으로 밀어붙인다. 멜로스가 말하는 ‘도덕성’은 힘을 통해 결정될 뿐, ‘감히’ 작은 폴리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아테네는 전쟁의 승패(勝敗)야말로 신의 뜻에 대한 ‘도덕성’의 증거라 믿었다. 아테네가 멜로스를 누를 경우 신의 뜻이 아테네에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이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아테네에 대한 반감이 멜로스 전역에 퍼져나간다. 중립을 지키겠다는 멜로스의 ‘도덕성’이 존재하는 한, 신이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확산된다.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 피를 나눈 스파르타가 도와줄 것이란 소문도 떠돌았다. 멜로스가 끝까지 중립을 고집하자, 아테네는 담판을 중단하고 곧바로 응징에 들어간다. 해상과 도시 주변을 전부 봉쇄한다. 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과는 아테네의 압승이다. 멜로스 남자 대부분이 학살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전부 노예로 팔려 간다. 아테네는 이후 자국민 500명을 보내 멜로스를 직접 통치한다. 폴리스 멜로스가 그리스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투키디데스가 ‘멜로스 담판’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폴리스 사이에 통하던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국제정치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한번 잘못 판단하면 전원이 학살되고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는 냉혹한 현실이라는 인식이 ‘멜로스 담판’ 속에 담겨있다. 투키디데스는 힘에 의존하는 아테네의 논리를 ‘아름답고 정의롭게’ 치장하지 않는다. 중립을 다짐하는 멜로스 입장에서 보면, 침략 명분을 얻으려는 억지 논리로 비친다. 그러나 아테네의 입장에서 보면 멜로스는 입(口)으로 살아남으려는 기회주의자로 여겨진다. 아테네는 멜로스가 중립을 지킨다고 해도, 결국 아테네에게 해를 가하는 나라라고 확신한다.
멜로스가 중립을 지킨다고 약속하고, 아테네가 이해한다면서 그냥 물러섰다고 가정해보자. 다른 모든 폴리스도 중립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면서 아테네에 ‘적극’ 동조하지 않을 수 있다. 멜로스 자체만이 아니라 에게해에 흩어진 수백여 크고 작은 폴리스에 영향을 주는 아테네 생존과 국익(國益)에 반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스파르타를 지원하지 않지만, 아테네도 돕지 않겠다는 것이 중립의 핵심이다. 아테네가 보면 평소에는 에게해의 평화유지 비용을 받아내야 한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는 더더욱 큰 직접적인 지원을 받아내야 한다. 따라서 중립은 아테네가 원하는 답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아테네 편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적이 된다. 나중에 배신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만이 아니다. ‘지금 당장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것이 아테네의 생각이다. 투키디데스는 그 같은 아테네의 생각을 현실 정치적 시각에서 담담하게 기술(記述)하고 있다. 믿어달라고 외치는 ‘도덕성’에 호소하는 논리도 편견 없이 전해 준다. 그러나 아테네의 무력에 맞설 무능력(無能力)한 존재가 멜로스란 점도 분명히 한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아테네나 도덕성에 호소한 멜로스 중 누가 옳은지에 대한 것은 투키디데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담판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만을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판단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독자들 각자에게 달려 있다. 2023년 국제정세를 보면 ‘멜로스 담판’이 ‘별세계의 논리’가 아닌, 일상적 풍경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투키디데스 함정‘ 만이 아니라 미국과 약소국 사이의 ’멜로스 담판‘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해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약소국(弱小國)이 아닌 이상 강대국(强大國)에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는다고 자신하는 국가들이 있다. ‘준(準)강대국’이니 ‘중견국(中堅國 : Middle Power)’이니 하는 말도 있다. 그러나 강대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 견줄 만한 강대국이 아니면 전부 약소국에 불과하다. 나름대로 행동을 보이며 버틸 수도 있겠지만, 강대국이 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2,500년 전 그리스를 포함한 국제정치의 근간(根幹)이지만, 세상은 강자와 나머지 약자로만 구성되어 있다. 강자가 아니면 약자일 뿐이다. ‘강자 비슷한 존재’는 없다.
2020년 문재인 정권하의 한국은 ‘멜로스 담판’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에서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 식민지,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미국에 대한 조롱, 비난, 멸시가 대세(大勢)로 자리 잡고 있었다. ‘멜로스 담판’의 현실을 무시하려는, 우물 안 개구리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었다. 시대는 ‘멜로스 담판’으로 흐르고 있었다. 20세기 냉전 당시 볼 수 있던 한일관계, 한미 관계는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미국 연준(Fed)의 한국에 대한 600억 달러 통화스왑,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 생산 관련 3개 핵심 부품에 대한 수출금지 차원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담판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멜로스 담판’에서의 아테네의 논리인 “강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멋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약자는 그들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세계관이 한미‧한일 관계에 밀려들고 있다. 당시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반미‧반일 같은 국내용 ‘애국 이벤트’를 통해 세(勢)를 모으는 것은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 통하지 않는 ‘멜로스의 도덕성’에 불과하다.
‘멜로스 담판’이 판치는 현실 세계로 나서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것이다. 미국은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전 세계 ‘멜로스 담판’을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미국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는 미국 제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미국 독립전쟁에서 공을 세워 하원, 상원의원을 거쳐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829-1837간 대통령 재임)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 바이든도 마찬가지이다. 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 노력하지만, 미국의 이익을 해칠 경우 강력한 군사력으로 응징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이다. 여기에는 동맹이라는 개념도 없다.
다시 말해 잭슨주의를 지향하는 미국의 지도자 트럼프나 바이든도 ‘세계=멜로스 담판의 무대’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조차 미군을 투입해 해결하겠다는 인물이다. 결국 트럼프나 바이든은 미국 국내‧외 할 것 없이 ‘멜로스 담판’의 논리를 밀어붙이는 인물들이라는 얘기다. 트럼프나 바이든이 옳고 그르고는 핵심 사항이 아니다. 아테네가 무력으로 누를 경우, 대국으로서 아테네의 권위가 실추될 것이라 말해도 의미가 없다. 미국이 가진 힘과 영향력의 대표자가 트럼프나 바이든이란 점이 핵심이다. 중국이 성장했지만 아직은 미국이 세계 최대 강국이다. 싫든 좋든 피할 수 없는 나라가 미국이고 그 미국의 대통령은 트럼프였고 지금은 바이든이다. ‘멜로스 담판’의 논리가 한층 더 가속화 될 것이다.
2020년 6월 3일 이수혁 주미 한국 대사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원칙에 따라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서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는다.”라고 기자 간담회에서 밝혔다. 이러한 이 대사의 발언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대변인 논평을 통해 “한국은 수십 년 전 권위주의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을 때 이미 어느 편에 설지를 선택했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이 수십 년 전이라는 과거형을 쓰며 “한국의 선택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한국은 동맹이자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 편에 서기로 오래전에 약속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으로 이해된다.